사진작가 김우영은 1년의 절반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에 있는 데스 밸리에서. 나머지 절반은 한국 근대화의 상징인 세운상가의 스튜디오에서 보낸다. 아티스트로 또 자연인으로 장대한 오디세이를 써온 그는 자연의 본성을 성찰하면서 마침내 고요를 찾았다.

작가님 덕분에 드물게 중정(중앙 정원) 구조가 남아 있는 건물에 들어와봅니다. 작가님은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고, 산업화·경제화로 급격하게 변화된 도시 풍경을 <Along the Boulevard> 시리즈에 담아왔습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작가의 작업실로 세운상가는 더없이 잘 어울립니다.

개인적인 연결 고리도 있어요. 건축을 전공한 형님 덕분에 김수근 건축가와 인연이 좀 있었죠. 그 시절에는 서울에서 커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 ‘공간’ 사옥밖에 없었어요. 공간 지하 1층에는 150석 규모의 국내 1호 소극장인 ‘공간사랑’이 있어 연극, 전통 예술, 현대무용, 실내악, 재즈, 건축 세미나 등이 매일 밤 이어졌죠. 홍익대학교 도시계획과에 다니던 시절에 주위에 미술, 음악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특히 사진을 좋아했어요. 카메라를 메고 청계천 변, 세운상가 일대를 찍었죠. 그때는 왜 내가 그런 걸 찍는지 몰랐는데, 의식하지 못한 채로 급변하는 도시에 남겨진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는 것에 마음이 갔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서울에서 작업실을 얻는다면 세운상가여야 했어요. 한국 근대화에 열망이 높았던 대통령과 ‘불도저’ 서울시장 그리고 현대건축의 거장이 만나 특별한 비전을 품었던 국내 최대의 건축 프로젝트였잖아요. 비록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곳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작업실은 원래 뭐하던 곳이었는지 아세요?

국민은행이라던가, 아무튼 은행이었다고 해요. 세운상가는 1960년대 중 반 서울 도심에 들어선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였어요. 아파트도 흔 치 않았던 시대에 최고의 시설을 자랑해 당시 유명 인사가 많이 거주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곳 5층에 은행이 들어선 모양이에요. 응접실로 사용 하는 공간은 원래 금고였던 터라 들어가면 돈 냄새가 나요(웃음).

1년의 반은 서울에서, 나머지 반은 미국에서 지내는 걸로 아는데요. 그러면 미국에서는 어떤 곳에서 지내세요?

(작업실에 걸린 사막 사진을 가리키며) 저기 근처에 살아요, 데스 밸리. 데 스 밸리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거기서 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애플 밸리라는 곳에 살고 있죠. 집이 드문드문 있어서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에요. 고독을 자처하는 곳이랄까요.

50대에 뉴욕을 등지고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에 정착해 사우스웨스트의 극적인 풍광과 고립 속에서 지냈던 조지아 오키프가 떠올라요.

잘 모르지만 조지아 오키프는 고독한 삶을 원했을 거고, 자연이라는 본질로 돌아가고 싶었을 거라고 짐작해요. 2007년에 패션계와 광고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 작업’을 하겠다고 서울을 떠나왔는데 작업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한 3년간 차를 몰고 미국 동부와 서부를 오가면서 비워냈어요. 좋아하는 도시에서는 하루, 이틀 머물기도 하면서 40일 정도 걸려 천천히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횡단했죠. 그때 우연히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에 걸쳐 광대하게 펼쳐진 데스 밸리를 발견했어요. 해수면보다 낮은 분지로 영화 <스타워즈> 촬영지로 유명하죠. 죽음의 계곡이라는 이름은 19세기 골드러시 때 붙었어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전역에서 금을 캐러 몰려들었는데, 암염으로 이뤄진 협곡과 바람이 전부인 황무지에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래서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었죠.

얼마 전에 출간한 작품집 <The Vastness I>, <The Vastness II>는 물과 땅이라는 우주적 생명의 시원을 탐구하고 수집한 기록을 담았어요. 땅을 탐구한 <The Vastness II>를 보면서 황망하고 가혹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는데 그게 데스 밸리군요.

네, 제가 방황하며 지난날을 회한 속에 돌아보던 때에 데스 밸리에 가서 느꼈던 엄청난 에너지, 공(空)인데 꽉 차 있는 그 기운을 오랜 시간 동안 탐구했고 <The Vastness II>에 모아봤어요. 거대하고 광막한 땅이 주는 기운이 저를 새롭게 해줬어요. ‘아! 작업하고 싶다’, ‘여기서라면 할 수 있겠다’하고 용솟음치는 마음을 아무것도 없는 그 땅에서 느꼈어요.

그런가 하면 <The Vastness I>에서는 물을 볼 수 있어요. 잔잔하게 흐르고 흰 포말을 일으키며 넘실대고 수정처럼 맑고 단단하게 얼어 있는 물이요. 왜 물인가요?

땅의 존재감을 감각하고 사진으로 담았듯이 생명의 원천인 물을 찍어보고 싶었어요. 데스 밸리에서 멀지 않은 요세미티,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중국 등에서 물의 다채롭고 본질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공부하면서 기록했죠. 그러면서 인간이 유한하고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고 동시에 물의 경이로운 존재감을 깨달았어요. 우리가 기후 위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자각했죠. <The Vastness I> 뒷부분에는 아이슬란드의 유빙을 담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유빙이 심각하게 녹아내리고 있어요. 이전에 그린란드도 몇 차례 방문했는데 그곳에서도 우리가 지구의 존속 가능성을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수정처럼 맑고 아름다운 빙하를 찍은 이유는 사진을 통해 그와 같은 실상을 전하고 싶어서기도 해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패션계와 광고계를 휩쓸며 상업사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잡지계의 지형은 어떠했고 어떤 활약을 하셨는지 듣고 싶어요.

서른 살쯤 늦은 나이에 뉴욕의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로 유학을 떠났어요. 사진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마쳤죠.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열고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우연히 유명 패션 포토그래퍼 제임스 무어와 연이 닿았고 패션 사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됐어요. 마침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 <Him>이라는 국내 최초의 남성 패션 매거진을 창간하면서 저를 스카우트 했어요. 막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분야라 경험 삼아 1년만 해볼 작정으로 뉴욕의 공간도 룸메이트에게 맡겨둔 채 서울에 왔죠. 그런데 그 1년이 점점 길어졌어요. 당시 경기가 좋아 광고 시장이 호황일 때라 그 바람을 제대로 탔죠. 포토 디렉터로서 여러 매체를 론칭시켰고 배우 송승헌, 소지섭을 데뷔시킨 의류 브랜드 스톰, 닉스 광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영애를 모델로 한헤라의 화장품 광고를 필두로 많은 작업을 했죠. 저는 언제나 새벽에 촬영했는데, 디자이너 선생님들은 옷의 디테일이 보이지 않는다며 화를 내셨지만 사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는 패션 화보를 선보였다고 자부해요. 지나치게 아방가르드하다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요(웃음). 어느덧 2000년이 되었고 저는 정상의 위치에서 한국의 문화, 아니 전 사회가 완전히 달라지는 광경을 지켜봤어요. 특히 패션 잡지계의 변화는 새로 태어나는 수준이었죠. 1990년대 초반부터 <엘르>, <바자>, <보그> 등 라이선스 매거진의 한국판이 론칭했고 모델 에이전시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죠. 포토샵이 도입됐고 패션 사진 분야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그즈음 이제 커머셜 작업을 내려놓고 내 작업을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에게 사진이라는 매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도시 환경의 생성과 소멸, 변화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예요. 궁극적으로 무얼 찍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시간의 흔적을 담는다고 말해요. 1970년대 중반 종로 일대를 카메라에 담았던 대학생 김우영의 시건이 오랜 세월 갈고닦여 응축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산업화·경제화로 급격하게 변화된 도시 풍경을 <Boulevard> 시리즈에
담아온 김우영 작가의 작업실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세운상가 5층에 둥지를 틀고 있다.

8월부터 9월 초까지 갤러리 나우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Inhabiting/Uninhabited>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도시 시리즈 <Urban Odyssey> 연작 중에서 대담한 구성과 화려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인 다고 들었어요. ‘색’은 어떤 이유로 중요한가요?

색이라는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시각 요소를 제공해 서사의 가능성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지난해 발간한 작품집 <Urban Odyssey(North America)>를 넘기다 보면 같은 장소인데 새로 칠한 페인트 등 변화된 색의 요소가 눈에 띄어 시간이 흘렀다는 걸 대변에 알 수 있는 작품들이 있어요. 저는 눈에 가장 편하고 보편적인 표준 렌즈를 사용하고 리터치는 거의 안 해요. 저에게 사진이라는 매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도시 환경의 생성과 소멸, 변화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예요. 궁극적으로 무얼 찍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시간의 흔적을 담는다고 말해요. <Urban Odyssey>는 산업화·자본화로 인해 변해가는 도시의 시간을 건축물·구조물에 담아내는 시리즈로, 1970년대 중반 종로 일대를 카메라에 담았던 대학생 김우영의 시선이 오랜 세월 갈고닦여 응축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관람객이 사진에서 보는 건 찰나이지만 저는 한 장소를 한 번에 가서 찍는 법은 없어요. 오랫동안 알고 있던 무인의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해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죠.
이번 전시의 제목이 <Inhabiting/Uninhabited>인 이유는 사진 속 대상이 기록되면서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장소가 작가에 의해 ‘거주하는’, 즉 생명력이 있고 입체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에요. 전시 기간 동안 키아프 서울(Kiaf SEOUL)에서도 같은 시리즈를 영상 작품으로 변환하여 선보일 예정이에요. 첫 시도인 셈인데 어떤 반응을 얻을지 궁금해요.

<Urban Odyssey>와 함께 발간한 <Poetics of Tranquility> 속 <한옥(Hanok)> 시리즈가 인상 깊었어요. 기하학적인 추상화 같더라고요.

2016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가 혜곡 최순우 선생의 탄생 100주년 되던 해에 성북동에 있는 ‘최순우 옛집’에서 전시를 열면서 선보인 시리즈예요. 빼어난 눈으로 한국의 미에 관해 한평생 연구하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같은 명저로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분을 기리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민이 컸어요. 최순우 선생에 따르면 ‘욕심이 없고 덤덤한 매무새’라는 한국 미술의 마음씨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자연 그대로’를 어떻게 담백하게 담아내서 혜곡의 정신을 살릴까 고심하면서 1년간 청평사, 송광사, 화엄사, 소쇄원, 소수서원 등 전국 사찰과 서원을 돌았어요. 담양의 소쇄원에서 가장 가까운 무인텔에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어요. 밤새 눈이 펑펑 내린 다음 날 새벽, 인적이 끊긴 소쇄원으로 가는데 발이 푹푹 빠지더라고요. 그때 새하얗게 덮인 눈밭에 검은 선이유려하게 난 모습을 보고 <소쇄원(Soswaewon)> 시리즈를 찍게 됐고 그작품을 통해 영감을 얻어 한옥이 지닌 선과 구조가 자아내는 시간의 흔적, 한국 특유의 미를 <한옥> 시리즈에 담아낼 수 있었어요.

<소쇄원>과 <한옥>이 그런 연결성을 갖는군요! <한옥> 시리즈를 보면서 한옥의 건축적 선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멋스럽구나 했어요.

우연히, 자연스레 존재한 듯하죠? 그게 바로 혜곡 최순우 선생이 말한 애쓰지 않는, 무덤덤한 아름다움이 아닐까 해요. 앞으로는 건축물을 이루는 나무와 돌, 더 나아가 흙과 물, 자연의 본성을 성실하게 탐구하고 싶어요. 그럴 때 아티스트로서 진짜 나다운 걸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에 고요와 평온이 깃들어요.

Art Columnist An Dong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