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 있는 추진력으로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꾸준하게 컬렉션을 전개하고 있는 준지(Juun. J)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욱준을 만났다.

디스트로이드 데님 재킷이 부착된 레더 보머 재킷은 Juun.J.

화보 촬영 때 오랜만에 준지의 컬렉션 전체 룩을 직접 보며 다시 한번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2년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처음 시작했는데 오랜 시간 꾸준함을 지킬 수 있었던 노하우는 무엇인가?
돌아보니 2002년 서울 컬렉션을 선보인 이래 23년 동안 44개 이상의 컬렉션을 했다.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어떻게 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디자이너로서의 소명감도 있지만.

이번 컬렉션의 키워드가 ‘브로큰’이다. 단순히 옷으로만 보면 해짐, 커팅 같은 디자인적인 디테일이 눈에 띄었다. 또 다른 의미가 있나?
쉽게 표현하면 정상적이지 않은 옷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너무 멋있는 옷만 만들려고 애썼던 것 같아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것을 깨부수자는 의미로 자유롭게 시작했다. 데미지도 굉장히 심하다. 그냥 커팅이 아니라 몇 번 입으면 다 찢어져버릴 것처럼. 처음에는 예쁘게 모양을 내며 자르다가 나중엔 ‘그냥 다 찢어버려’ 하면서 과감하게 작업했다.

준지가 추구하는 남성상이 있다. 모델 선택도 이에 영향을 미치는가?
요즘은 다양성을 중요시한다. 블랙 모델이 대세이기도 하고, 전신에 타투를 한 모델, 또는 너무 예쁜 모델까지 여러 타입의 모델을 통해 준지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30대에 브랜드를 만들고 40대에 파리에 진출하겠다’라는 목표를 이루었다. 50 ~60대의 목표는 무엇인가?
 50대에는 준지를 패션 하우스로 만드는 것. 옷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까지 갖춘 하나의 하우스로 브랜딩하는 것이다. 예전엔 모든 것에 정확하게 목표를 세워 두고 이에 맞춰 나아갔다면 요즘은 좀 더 열어두려고 한다. 브랜드를 잘 성장시키다 보면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하며 비즈니스에서 날 선 감각을 보여 주었다. 현재는 어떤 부분에 집중하고 있나?
모두 알다시피 요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디지털이며, 이커머스는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는 마켓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오프라인적인 준지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에서 충족할 수 없는 고유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어야 미래가 있고, 클래식한 감성은 형태로든 문화로든 계속 고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디자이너는 디지털 쇼나 룩북으로만 컬렉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한 현상이긴 하지만 온라인을 통해 쉽게 브랜드가 생겨나고 사라지다 보니 깊이가 없는 건 맞는 듯하다. 준지는 그 과정이 느리고 복잡할지라도 직접 보여주고 하나의 문화를 다룰 수 있는 기획을 하고 싶다. 아날로그만이 가진 판타지랄까. 컬렉션도 파리 뿐 아니라 장소를 옮겨 여러 도시에서 펼치고 싶다.

퍼 보머 재킷과 후드 집업은 모두 Juun.J.

파리에서 컬렉션을 전개하고 있지만 준지의 시작은 서울이다. 처음 준지를 론칭했을 때와 지금의 서울은 어떻게 다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는 온라인 숍도 없었고 유통에서 국내 디자이너가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다. 디자이너로서 생각해보면 비즈니스적인 한계가 있어 막막한 시대였기에 어쩔 수 없이 파리 진출을 꿈꿨다. 그래서 파리 컬렉션을 할 수 있는 돈이 통장에 모이자마자 바로 파리로 떠났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베이스로 한다는 것은 어떤 장점이 있는가?
모든 것이 빠르고 정보 습득이 용이하며 어떤 문화든 빠르고 제대로 접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다. 글로벌화되어 있고 트렌디하고 젊은 도시라서 모든 분야를 망라해 최첨단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축복이라고 본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있나?
남산! 나는 남산 바로 밑에서 태어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와 같이 정상까지 올라가곤 했다. 그 때는 정상에서 스테인리스 우유 통에 들어 있는 따뜻한 우유를 나무 컵에 따라 팔았다. 어른은 소금을, 아이는 설탕을 타서 마셨는데 그 따뜻한 우유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산순환도로 역시 낭만과 추억이 있는 곳이고. 퇴근할 때 한남대교를 건너며 정면으로 보이는 남산의 아름다운 정경에 매일 감탄한다. 아름답고 평온하다.

그런 서울에서 영감을 주는 곳이 있다면?
서울의 모든 테라스 카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걸 좋아한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말도 안 되게 입었는데 멋있는 사람들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1950년대 옷을 입고 나온 룩도 재미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매칭과 아웃핏을 디자이너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이 즐겁다.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오전 6~7시 사이. 일찍 기상하는 편이라 일어나면 커피를 내려 마시며 한 시간 정도 어제의 일과 그날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하며 스케줄을 정리한다. 잠들기 전에 마시는 와인 한 잔의 시간도 나를 행복하게 한다.

현재 꽂혀 있는 것이 있다면?
여행! 시간이 날 때마다 반려견과 갈 수 있는 국내 여행지를 찾아본다. 콘텐츠로 가득한 세상이다.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은?
<나의 해방일지>를 쓴 박해영 작가의 팬이다. <나의 아저씨>도 인생 드라마다. 애절하고 따듯하고 지긋지긋한 감성이 담겨 있어 좋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그런 지긋지긋함이 좋다.

준지를 롤 모델로 하는 서울의 많은 영 디자이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디지털적인 접근으로만 다가가지 않으면 좋겠다. 음식, 영화, 음악과 마찬가지로, 패션은 문화적인 부분에서 늘 클래식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렌드만 좇는 게 아니라 브랜드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지켜야 브랜드의 영속성이 있을 테니.

photographer Kim Jaehoon
contributing visual director Lee Mirim
editor Keem Hyobeen
hair Kwon Doyeon
makeup Jung Yoonmi
assistant editor Kim Soojin
location Museum Ident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