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딴 문화재단, 기념관, 건축상을 만들어라. 모든 책임은 딸 유이화에게 있다.” 2011년 건축가 이타미 준이 유언을 남겼고, 유이화 대표는 그 유언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3년여간의 준비 끝에 지난겨울 제주에 유동룡 미술관의 문을 열었다.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자연을 존중하는 건축가이자 예술가 그리고 아버지인 이타미 준의 마음이 되어 답을 찾아갔다. 그렇게 곶자왈의 다정한 숲과 인간의 생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제주를 지켜온 빌레, 그들이 품은 유동룡 미술관에서는 이타미 준이 관람객을 환대한다.

ITM 건축사무소 소장이자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 이사장,
이제는 유동룡 미술관 관장의 업무까지 맡고 있는 유이화 대표.

방배동의 ITM 건축사무소 사옥은 아버지 이타미 준 선생과 공동 작업으로 완성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만든 공간에서 계속 건축가로 살아가기에 그 의미가 더 특별할 것 같습니다. 1988년에 아버지가 자신의 아틀리에를 위해 대지를 구입했어요.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고 제가 대학생일 때는 이곳에 살며 학교에 다녔어요. 그러다 2002년에 ‘기억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사무소를 지어 개소했죠. 그러다 점점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고 직원 수도 많아지면서 보다 넓은 사무실이 필요해졌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두 번째 사무소를 다시 짓게 된 거죠.

건축가로 살아가는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계속 지켜봤기 때문에 그 길을 따르게 된 것 같아요. 때론 현장에서 아버지의 통역가 역할을 하며 아주 어릴 때부터 간접경험을 한 거죠. 건축 현장에서 도면이 그대로 이뤄지는 모습을 지켜봤고 아버지를 따라 울기도, 웃기도, 화내기도 하며 희로애락을 그대로 접했어요. ‘나도 무언가에 몰입하며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죠.

사무실 곳곳에 자리한 달항아리나 다른 전통 공예품들도 인상적이에요. 생전 이타미 준 선생은 달항아리에 애정을 드러낸 바 있죠. 한국 예술품의 어떤 점에 그토록 공감하신 걸까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계속 살다가 30대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하셨어요. 그때 일본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한국을 접한 거예요. 예를 들어 공간을 대하는 한국의 태도는 일본과 굉장히 달라요. 가령 일본의 정원은 내 집 앞에 온 우주를 담아 완벽주의를 추구한다면 우리나라는 앞에 보이는 저 산이 곧 내 정원이라는 태도를 가지죠. 옛 마당만 하더라도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잔치를 하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혼례나 장례를 치르기도 해요. 그 안에 한국만의 푸근한 정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아버지가 달항아리를 좋아하신 것도 그 안에 담긴 마음 때문이었어요. 일본의 도자기가 정원처럼 완벽주의를 추구한 것과 달리 우리나라 도자기는 도공이 때론 막걸리를 마시며 거나하게 취하기도 하며 빚어내죠. ‘무심’의 마음으로 턱 만든 거예요. 계산된 마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조형물이죠. 생전에 아버지는 종종 도공의 마음으로 건축을 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자연에 순응하며 겸손한 마음이 담겨 있는 한국의 공예와 건축에 심취하셨어요. 그래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아버지는 한국의 건축과 미술, 공예 등을 다룬 책을 써 일본에 소개하셨죠.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을 일본에 소개한다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아요. 그때는 한국인임을 드러내며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죠. 하지만 아버지는 당시 건축가로 했던 인터뷰만 보더라도 자신이 한국인인 것을 숨긴 순간이 없었어요. 오히려 한국의 미래를 예찬했죠. 얼마 전에도 그런 인터뷰 자료를 발견했어요.

건축가로 유명한 이타미 준이 아니라 한국 이름을 붙여 미술관명을 지었어요. 이것도 한국인으로서 이타미 준 선생이 지녔던 마음을 담은 걸까요?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에서 여전히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버지는 한국을 너무 사랑했고 끝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유동룡이라는 이름을 지키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공공의 성격을 지닌 미술관에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도 고민되었고요. 물론 아버지의 활동명을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동룡이라는 한국 이름을 쓰고 싶었어요.

유동룡 미술관이 아버지의 뜻을 담은 곳이지만 유이화 대표의 건축물이기도 해요. 그만큼 건축을 하며 수많은 숙제가 주어졌을 것 같아요. 엄청 부담스러웠어요. 정말 ‘미치는’ 줄 알았죠. 설계 기간도 길었고 고민도 많았고, 끝까지 확신이 없었어요.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수없이 질문했죠. 유이화가 설계하는 건물이지만 이타미 준을 담아야 했기에 ‘이타미 준다운’ 건축물이어야 했어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한 끝에 완성했어요.

유동룡 미술관에 담고자 했던 아버지의 건축 철학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건축 철학에서는 컨텍스트에 중심을 세우고 열매로서의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때문에 유동룡 미술관을 설계할 때 제주의 환경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점이 기본이었어요. 어디에 옮겨놓아도 다 어울리는 건축물이 아니라 꼭 그곳에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어야 하는 거죠. 제주의 오름에서 모티프를 얻은 포도호텔도 제주라는 환경 안에서 더 아름다운 것처럼요. 유동룡 미술관 역시 제주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어요. 미술관 창 너머로 제주 곶자왈이 보여요. 곶자왈은 숲의 환경이 아마존의 숲과 전혀 달라요. 정말 친근한 숲이죠. 보통 정글을 떠올리면 무섭지만 한국의 숲은 사람이 쉬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친근하고 부드러워요. 미술관 역시 그 친근함이 흐르게 하고 싶었어요. 용적률만 중시하면 이 대지를 압도하는 건물을 만들 수밖에 없어요. 주변 환경과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모델링 작업을 수없이 했어요. 아버지는 건축물 내외부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건물 어디에 있든지 주변 환경과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의 전통 건축이 지닌 가치이자 태도라고 여기셨죠.

시공 이후부터는 과정이 수월했나요? 제주는 원래 돌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땅을 파자마자 암반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공사를 시작하자마자 빌레(용암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한 너럭바위)가 드러났어요. 우선 공사를 중지시킨 후 땅부터 팠죠. 그랬더니 평평하고 넓은 암반이 나왔어요. 그래서 설계를 변경해 카페 위치를 바꿨어요. 손님이 앉았을 때 빌레와 바로 소통할 수 있게끔 했죠. 그리고 암반이 있는 곳에 어린이 교실을 뒀어요. 아이들이 야외 수업을 할 때 이 돌 위에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해요. 설계를 바꿔야 했지만 빌레는 보물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빌레에 맞춰 설계를 바꾼 까닭에 공사가 8개월 정도 지연됐어요.

유동룡 미술관이 제주에 자리한 건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을 설립하기 전인 2017년부터 미술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계속 제주를 오갔어요. 몇 년간 여러 방면으로 고민했죠.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비용이었어요. 재단이 자리 잡기까지 적어도 10~20년은 걸릴 텐데 이타미 준의 철학을 잘 지켜내며 드러낼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쉽게 기업의 후원도 받을 수 없었죠. 고민만 하다가는 시작도 못 할 것 같아 일단 선포부터 하기로 했어요. 기자회견을 한 거예요.(웃음) 그렇게 소문을 낸 다음 제주 지역 건축가를 비롯한 여러 건축가와 좌담회를 가지며 다양한 의견을 들어봤어요. 제 생각만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다른 의견도 듣고 싶었어요. 그러다 마침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공매로 나온 도유지를 알게 되어 그곳에 미술관을 짓게 된 거예요.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지역이고 아버지의 청년 시절에 가장 친한 친구였던 김창열 선생님의 미술관이 있어 친숙했죠.

시작부터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어요. 고난과 고민의 시간을 지나 무사히 제주에 유동룡 미술관을 설립하기까지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나요? 감사한 게 너무 많아요. 미술관 설계를 시작하기 전에도 아무 목적 없이 제주에 내려와 이곳 분들에게 계속 고민을 털어놨죠. 제주의 많은 분이 제주에 유동룡 미술관이 지어질 수 있도록 큰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셨어요. 길을 잃지 않고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건 그분들의 응원과 더불어 아버지와 저의 끈이 단단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는 왜 그토록 제주를 사랑하셨을까요? 제주의 바람과 숲, 바다 같은 자연환경을 너무 사랑하셨어요. 제주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고요. 그리고 건축가로서 누구보다 제주를 가장 잘 이해한 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건축물을 ‘자식’이라고 표현하셨어요. 건축물의 생명 역시 유한하므로 언젠가 다 땅으로 돌아가겠지만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이 제주에 있었죠.

그러고 보면 개발은 건축의 아이러니한 면인 것 같기도 해요. 개발로 인해 아름다운 건축물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개발 덕분에 아름다운 건축물을 볼 수 있죠. 맞아요. 건축가분들이 제게 해주신 말씀 중에 가장 감사했던 것도 개발에 대한 얘기였어요. 제주를 어떤 방향으로 개발해야 할지 길을 잡기 힘들 때 앞으로의 방향성을 보여준 건축가가 이타미 준이라 하셨어요. 지금은 의식 있는 건축가들이 아름다운 제주를 해치지 않고 개발하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하지만 과거에는 좀 부족했던 거죠.

이타미 준이 제시한 개발의 방향성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말년의 대표 작품, 그러니까 1990년대 후반부터 2011년까지 작품을 제주에 많이 남기셨어요. 그때는 주로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로서 건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셨어요. 대지를 캔버스 삼아 풍경의 일부가 되는 건축을 하고자 하셨죠. 인간의 시선이 아닌 하늘의 시선으로 건축하려는 것이었어요. 건축가도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겸허한 자세로 자연에 순응하며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한라산 풍경에 착안해 핀크스 GC 클럽하우스의 지붕 모양을 만드셨고 방주교회는 지붕 위에 하늘을 담고자 했어요. 풍 미술관은 바람이 온전히 악기가 될 수 있도록 설계했고요. 포도호텔 역시 대지의 일부로서 작업하셨죠. 사실 그 넓은 대지에 객실 26개의 호텔을 만든다는 건 건축주 입장에서도 정말 비효율적인 일이에요. 하지만 클라이언트 역시 파트너가 되어 이런 건축을 깊이 이해하고 뜻을 함께한 거죠.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이 담긴 유동룡 미술관이 지난한 시간을 지나 완성되었어요. 이제부터 중요한 건 미술관 운영일 것 같아요. 지금부터 또 숙제가 시작된 셈이에요. 첫 번째 전시는 건축가로서 40년 동안의 인생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이타미 준은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화가였고 시인이기도 했어요. 다양한 장르에서 경계의 구분 없이 활동하셨죠. 1회 전시는 상설 전시관과 기획 전시관에서 모두 이타미 준 작품으로만 진행하고 있어요. 내년 7월부터는 2회 전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타미 준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를 확립한 건축가인 만큼 2회 전시에서는 국적과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색을 가지고 오리지널리티를 확립한 분들의 작업을 함께 전시하고 싶어요. 주제에 따라 젊은 작가와 함께할 수도 있고요. 현재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 중이에요.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도 활발히 진행 중이에요. 얼마 전 세대별 건축 교육이 유네스코 한국 위원회로부터 ‘지속 가능 발전 교육’ 인증을 받았어요. 이타미 준 건축문화재단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을 후대에 알리는 것이에요. 어른이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린이에게도 꼭 필요한 철학이라고 생각해요. 거창하게 건축을 교육하려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자연과 보다 친해지고 교감하는 것이 목표예요. 최근 진행한 청소년 프로그램에서는 집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가져와 의자 같은 가구를 만드는 수업을 했어요. 미술관 사업 못지않게 교육 사업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이 자연을 통해 힐링하고 회복하는 경험을 꼭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건축학도나 젊은 건축가에게도 이 미술관이 좀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미술관의 슬로건이 ‘Find your originality’예요. 직업을 떠나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에서 지금의 시대정신에 따라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이타미 준이라는 건축가를 통해 한 번쯤 했으면 해요. 유동룡 미술관은 전시료가 아니라 입장료를 받아요. 오디오 도슨트를 반드시 권하고요. 오디오 도슨트를 통해 작품을 감상한 다음 티 하우스에서 티 한 잔을 즐길 수 있죠. 파우치도 하나 제공하는데 그 안에 전시 관련 자료와 함께 읽으면 좋을 도서 목록 리스트가 들어 있어요. 몽당연필로 읽고 싶은 책을 체크해 컨시어지에 주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죠. 굉장히 조용한 미술관이에요. 사색의 분위기를 위해 인원 수도 제한하고요. 관람객이 티 라운지에서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 그 풍경을 저는 미술관에서 제일 좋아해요. 아무도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제지하지 않지만 자연스레 분위기가 만들어지죠.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통한 것 같아 좋아요.

운영 방식이 일반적인 미술관과 매우 달라요.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나요? 무엇보다 이타미 준의 정신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른 전시장의 형태와 달라졌어요. 미술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머물면서 여행하듯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이타미 준과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한 관람객이 “마치 이타미 준의 집에서 환대를 받는 느낌이다”라고 하셨어요. 이타미 준의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설계하고 완성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운영하다 보면 어떤 감각으로 공간을 채울지도 고민하게 되지 않나요? 공간 안의 공기를 컨트롤하고 싶었어요. 공기의 진동은 음악일 것이고 또 향이 있겠죠. 저 역시 할머니 집을 냄새로 기억해요. 후각으로 기억되는 뮤지엄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술관만의 향을 만들게 됐어요. 아버지는 늘 벼루에 먹을 갈았기 때문에 서재에 가면 항상 그 냄새가 났어요. 먹 향과 오래된 서적에서 나는 냄새, 고미술 상자에서 풍기는 오래된 나무 냄새 등을 연상하며 이타미 준 뮤지엄 향을 만들게 됐어요. 미술관을 나서도 그 인위적이지 않은 향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죠. 공기의 진동을 만드는 음악은 양방언 선생에게 부탁했죠. 무턱대고 찾아가서는 미술관을 선생의 음악으로 채우고 싶다고 했어요. 흔쾌히 응해주셨고 BGM 리스트를 꾸려주셨죠.

유이화 대표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는 미술관이에요. 앞으로 지속 가능한 공간에 대한 고민도 있을 것 같아요. 이타미 준의 건축 자체가 시대정신을 기반으로 해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기획과 10년 후, 20년 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겠죠. 이타미 준이 자신의 건축을 통해 시대정신을 전했다면 이제는 유동룡 미술관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미술관이 이 시대에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앞으로 해가 거듭될수록 전시 아카이빙이 쌓일 것이고,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미술관은 그 시대에 이런 목소리를 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해요.

Photographer Lee Jaemin
columnist Park Min


images/유동룡 미술관(©건축사진가 김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