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49년생 윤영주입니다”로 자신을 소개하는 윤영주. 모델, 큐레이터, 작가 등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며 다채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강진을 다녀왔다. 한옥 스테이 ‘올모스트홈 스테이 by 에피그램 강진’과 월출산 차밭 등 자연을 온전히 느끼며 잊고 있던 나를 만나는 공간, 강진에서 그녀가 누렸던 의미 있는 시간 여행.

에피그램의 단아한 외부 전경.

나는 차를 마신다. 찻잎으로 마시던 차와는 다른 차 맛이다. 찻잎을 떡처럼 찧어 만들었다는 떡차에 금잔화를 얹어놓은 차다. 깊은 맛이며 단맛이 난다고 씌어 있지만 내 입은 편안한 맛, 은은한 맛을 느낀다. 백운옥판차는 은은한 맛이 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지닌 차. 다산의 유배 시절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이 스승과 헤어진 후에도 지속적으로 차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이 100년 이상 대를 이어 집안의 전통차를 만들었다니 진정으로 자랑스럽다. 일제강점기 때도 우리나라 차가 일본 차로 둔갑할까 싶어 고유한 차 이름을 지었으니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가. 우리 차의 정체성을 지켜준 백운옥판차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준다. 요즈음 사회가 어지럽다고 뉴스마다 전한다. 가슴이 답답함을 자주 느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얼마나 유유자적한가. 차 한 잔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주변 세계가 어떻게 변해가든 내가 무슨 힘으로 나의 외부를 변화시킬 것인가. 그러나 내가 나를 만들어갈 수 있지는 않을까.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독거려본다. 마침 좋아하는 바흐의 콤팩트디 스크를 CD 플레이어에 올려놓으니 <마태수난곡>중 ‘자비를 베푸소서’가 오보에를 타고 흐른다. 바흐의 곡은 몰두해 듣지 않고 하루 종일 배경음악으로 삼아도 질리지 않는 음악이기에 사랑한다. 그리고 종교가 없는 내가 잠시나마 신을 향해 가고 싶게 만든다. 더구나 다산을 따르던 어린 제자의 후손이 만들었다는 차를 마시고 있는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그러하다. 이번 강진 여행은 행운의 연속이다. 광주역에서 내려 강진으로 가는 도중에 근육이 울퉁불퉁한 젊은이의 형상 같은 월출산을 본 것이 첫 번째다. 정말 잘생긴 산이다. 문득 이 산의 정기를 받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 났다. 월출산을 등에 진 차밭으로 가리라 마음먹었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에서 자란 차를 마셔보자. 그 차밭이 이시헌의 후손이 일구어놓은 곳인 줄도 모르고 찾아갔다. 차밭은 그리 크지 않았다. 연두색의 어린 잎이 아름다웠다. 마침 내가 입은 연두색 블라우스의 색과 어울렸다.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처럼 건강하게 해달라고 잠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릴까 눈치 보며 입속으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인가. 새벽부터 일어나 더운 날씨에 이곳저곳 찾아 다녔는데도 힘이 펄펄 난다. 내 소원을 들어준 거야, 월출산이. 언젠가 다시 찾아 가리라. 월출산이 있는 강진에.

강진은 지나간 시간에 나를 얹어놓는 곳. 잃어버린 시간이 안타까워 찾아 헤매도 그리도 잡히지 않았던 길고 먼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곳. 강진은 화려한 곳도, 재미를 주는 곳도 아니다. 더 깊은 데까지 나를 데려가 애틋한 시간을 갖게 해주는 곳이다.

강진은 20여 년 전에 남편, 딸과 함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들고 찾았던 곳이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자마자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은 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묵은 김치는 잊을 수 없는 맛이다. 현장 답사를 위해 하루 전에 내려온 촬영 팀에게 던진 첫 질문이 “김치 먹어봤느냐”였다. “다산초당에 가봤나요?”, “그곳은 아직 그대로 잘 있나요?”, “내가 왔다고 말했나요?” 이런 우아 한 질문이 아니라 “김치 먹어봤어요?”, “우리 뭘 먹을 건가요?”였다. 아직도 식욕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강진에 와서 다산을 묻지 않고 음식만 물은 것은 강진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촬영을 끝내고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얼마 전 지나가다 잠시 들렀지만 인적이 없어서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인가 하던 집 옆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초당으로 가기 전에 4년 동안 머물렀다는 사의재. 바로 그 사의재 옆의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미 차려놓은 밥상에 그렇게도 그립던 묵은 김치가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점잖게 기다려야 한다. 뜨거운 흰밥이 나올 때까지.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 젓가락을 들지 않을 거야. 내 머리는 차가우나 내 몸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지 어찌하겠나! 차가운 이성은 그러라고 하지만 나는 참지 못한다. 젓가락을 들고 김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탄성을…. 이거야. 이 맛이야. 이래야지. 20년 전에도 이랬어. 남편과 눈을 마주치며 미친 듯이 먹어댔지. 김치는 나를 그때 남편과 함께했던 그 시간으로 데려간다. 우리가 존재했던 그 자체로 나를 데려간다. 잃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을. 다시 되찾고 싶다.

자연을 온전히 느끼며 차밭에서 소원을 비는 듯한 윤영주.
월출산 끝자락에 위치한 푸르른 차밭.

되찾고 싶은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로 가게 해주는 곳. 어슬렁거리던 동네가 있는 곳. 어린 시절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고 고무줄 놀이를 하던 곳. 그런 골목길이 오밀조밀하게 자리한 곳. 나를 옛 기억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곳. 내가 묵을 곳은 에피그램 한옥이다. 이곳은 그냥 한옥 체험을 하는 장소가 아니다. ‘AlmostHome Stay by Epigram.’ 집에 있듯이 편안하다는 뜻의 문구가 붙어 있는 한옥 스테이다. 한옥이라는 막연한 향수만 떠올리며 오래된 한옥에서 불편한 하룻밤을 지냈던 기억이 있는 나는 이번 여행을 또 다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간 가슴에 담고 있던 강진에서는 ‘강진 산책’을 테마로 만든 ‘올모스트홈 스테이 by 에피그램 강진’을 택하기로 한 것. 다산이 머물던 사의재 옆, 한옥과 초가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호텔에 로비가 있듯이 이곳에는 나를 반기는 환영재가 있다. 환영재에서는 시원한 동백초 한 잔을 대접하고 미처 몰랐던 이야기도 들려준다. 올모스트홈 스테이 by 에피그램은 코오롱에서 기획한 로컬 프로젝트라는 것. 익숙한 듯하지만 낯선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경험을 하며 공감하자는 의미에서 이런 마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머물기도 전에 편안함과 훈훈함이 느껴진다. 관리인의 안내로 앞마당에 들어서면 나팔꽃, 분꽃, 맨드라미가 피어 있을 것 같은 ‘미음 자’ 마당이 나온다. 굵고 믿음직스러운 기둥을 따라 살짝 올라간 처마 그리고 기와지붕이 어제 본 듯 친밀하다. 댓돌에 올라서서 창호지문 문고리를 잡으며 잠시 눈을 감는다. 금방이라도 엄마가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지” 하며 나오실 것 같다. 혹시나 하고 문을 연다. 작은 창문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내린다. 대나무가 살짝 움직이며 반기지만, 엄마는 없다. 싱크대 옆에 있는 앙증맞게 작고 예쁜 정수기가 나를 깨운다. 찻잔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인 마음이 느껴진다. 큰 방을 지나 침실 문을 여니 모시로 만든 커튼이 하늘거린다. 창가의 크리스털 종소리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들릴 듯 말 듯 내 귀를 간지럽힌다. 아! 이 적막함. 여기 이 툇마루. 밥 한술 뜰 때마다 굴비를 찢어 얹어주던 어린 나의 젊은 엄마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잠시 발길을 멈춰 선다. 이제 나는 이 세상 떠나기 전 엄마의 모습을 하고 툇마루에 앉아 엄마를 그리워한다. 언젠가 내 딸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며 그리워하겠지. 꼬리를 무는 상념이 끊임없이 이어져 일어날 줄 모 른다. 해는 저물어가고 마당 너머 나뭇잎을 멍하니 바라보며 온 종일 이렇게 보내고 싶다. 강진은 그러한 곳. 지나간 시간에 나를 얹어놓는 곳. 잃어버린 시간이 안타까워 찾아 헤매도 그리도 잡히지 않았던 길고 먼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곳. 강진은 화려한 곳도, 재미를 주는 곳도 아니다. 더 깊은 데까지 나를 데려가 애틋한 시간을 갖게 해주는 곳이다.

writer Yoon Youngjoo